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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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행동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 본회퍼(Bonhoeffer, 1906~1945).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나치운동의 선구자로 히틀러에 대항하다 처형된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이자 신학자. 노동과 외국인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초교파적 입장으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도 교류한 평화주의자. 전쟁을 반대하고 유태인을 옹호하며 그들의 독일 탈출을 도왔던 행동주의 신학자. 1906년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 있는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난 본헤퍼는 16세 때 신학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17세에 튀빙겐대학에 들어가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18세에 베를린대학으로 옮긴 그는 3년 동안 루터계열의 전통신학을 공부하고 1928년 22세의 나이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독일인을 위한 교회 부목사로 일한다. 이듬해 베르린으로 돌아와 교수자격논문 <행위와 존재: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존재론과 선험철학>을 제출한 그는 1930~1931년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면서 뉴욕 할렘가의 흑인을 통해 인종차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31년 베를린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1935년 나치정부에 의해 교수자격을 박탈당하며 쫓겨날 때까지 조직신학 강사로 <그리스도론> <창조와 타락> <교회의 본질>에 대해 강의한다. 1932년8월 스위스에서 열린 에큐메니컬 대회에서 ‘교회는 죽었다’란 강연을 해 행동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낸 그는 1933년 1월30일 히틀러가 중권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하자 2월1일 <지도자와 젊은 세대>란 라디오 강연을 통해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의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던 중 강연이 중단된다. 그는 감시대상에 오른다. 히틀러에 의해 독일교회가 그를 추종하는 독일적 기독교로 변질하자 1935년 본회퍼는 거기에 저항하는 고백교회의 책임자로 신학교에서 <나를 따르라> <성도의 공동생활>등을 강의하면서 신학도들을 훈련시키고, 독일교회를 철저한 복종과 자기 헌신의 교회로 개혁해 나가려고 했으나 게쉬타포에 의해 1937년 폐쇄 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1939년 미국 유니온 신학교 대학 초청으로 미국에 머물던 본회퍼는 1940년 독일로 돌아와 외국교회와 접촉하면서 반히틀러 운동을 전개하다 1943년 4월 5일 체포된다. 그때가 마리아란 여인을 만나 약혼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다. 결국 히틀러 암살계획과 관련된 서류가 발견되어 독일이 패전하기 불과 한 달전인 1945년 4월8일 그는 36세의 나이로 처형당하고, 시신은 소각된다. 그는 죽기 전에 "이것이 끝,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옥중에서 그는 시, 신학적 기록들을 남겼으며 부모와 형제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는 훗날 <옥중서신>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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